빌딩의 숲 속에 있는 당신의 호흡이 불편하다면
그리고 문득 올려다 본 하늘에 시선을 뗄 수 없는
증상이 생기기 시작했다면 당신에게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을 처방해드린다.
치열하게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내 자신을 점점 잃어가는 기분이 들곤 한다.
우리는 사회에서 맡은 각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수 많은 계획과 노력을 하는
반면 우리의 쉼에 대해서는 구체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일’ 하는게 아니듯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쉼’ 또한 아니라 생각한다. 이
생각에 동의한다면 대명항행 버스에 몸을 실어보자.
도심과 바다는 뭔가 양극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항구로 가는
버스에 있는 나의 몸은 기나긴 여정을 대비라도 하는 듯 의자에 푹 가라앉는다.
이어폰을 끼고 평소 좋아하는 음악들을 골라 재생 시켜본다. 창 밖으로 펼쳐지는
낯설지만 설레는 풍경. 얼마 지나지 않아 도심의 풍경이 소나기에 옷 젖듯 항구의
풍경으로 바뀐다. 어리둥절 두리번 거리는데 버스 기사님이 일어나 손짓하신다.
“종점이에요”
이른 도착에 당황한 나의 손은 주섬주섬 짐을 챙기고 버스 통로를 걸어나오며 생각한다. ‘벌써 바다라고?’
대명항에 도착하니 갈매기가 환영의 인사를 건낸다. 눈과 귀로 갈매기와 인사를 나눌 때 즈음 코로 서해의
바닷내음이 찾아온다. 이 세 감각의 소통만으로 이미 몸과 마음이 시원해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항구를
걸어본다. 썰물로 훤히 들어난 갯벌이 보인다. 진한 갯벌은 이 곳이 서해임을 말해준다. 문득 초등학생 시절
책상에 앉아 ‘조석간만의 차’ 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끙끙 앓던 기억이 스친다. 당시 나는 썰물에 대해 ‘태양과
달이 지구를 잡아당겨서 물이 빠져나갔다’고 이해했다. 그래서인지 서해에 갯벌이 많은 이유는 ‘달과 태양이
서해를 더 좋아해서’ 라고 생각했다.
풋풋한 추억에 잠겨 항구를 거닐던 중 주차장 공터 중앙에 길게 위치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잔잔한 항구의 기운과는 상반된 활기 넘치는 인파. 그 활기찬 발걸음에 나도 동참 해본다.
<대명항 수산물 직판장> 이다. 초록색 복도를 중심으로 양 옆에 수 많은 수산물 가게들이 펼쳐져있다.
“크고 싱싱해요!” 라는 노랫가락에 맞춰 싱싱한 수산물들이 힘차게 춤을 춘다. 펄떡이는 생선, 자리 싸움하는 꽃게 그리고
어느정도 마음을 정리한 듯한 소라까지. 어부들이 직접 잡은 수산물을 곧바로 어판장으로 옮겨파는 직판장 이라고 한다.
놀라운건 높은 퀄리티에 비해 정말 저렴하다. 개인적으로 수산물을 좋아해 동네 시장이나 수산시장을 즐겨찾지만 이 곳의
퀄리티와 가격을 보니 생각이 많아지는건 기분 탓일까.
개인적인 의견으로 평화누리길1 코스를 반대로 걸어서 도착지점을 대명항으로 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반나절 열심히 걷고 이 곳에 앉아 소주에 회 한 점하면 그 무엇에 비할까 싶다. 봄이면
알이 가득한 삼식이와 쭈꾸미, 여름이면 농어와 광어, 가을이면 살 찐 꽃게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다음엔 코스를 그렇게 짜봐야겠다. 이 싱싱한 해산물 앞에 서성이는 내 다리를 설득해 애써 걸음을 옮겨
본다.
직판장에서 나와 평화누리길 초입으로 가는 길목에 근엄한 자태의 군함이 보인다. 당장이라도
출항 할 것 같은 군함의 용맹함이 발걸음을 <김포함상공원>으로 이끈다. 이 군함은 2차
세계대전과 월남파병에 참전 했던 <운봉함>이라고 한다. 62년 간 평화를 위한 격동의 역사를
보내고 이 곳에 잠들어 있는 운봉함을 보아하니 마음이 절로 겸허해진다. 운봉함 외에도
공원의 곳곳이 예쁘게 꾸며져 있어 사부작 사부작 돌아보며 본격적으로 걷기 전에 미리 몸을
예열시켜본다.
공원을 바라보고 오른편에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초입이 보인다. 자 여기서 빨간펜 밑줄 쫙, 별표 땡땡.
평화누리길로 들어서면 어떠한 매점이나 자판기도 없다. 반드시
이 초입에서 미리 충분한 물과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자. 그렇게
힘든 코스는 아니지만, 결코 만만한 코스도 아니다.
편의점 쇼핑으로 조금은 묵직해진 배낭을 짊어지고 <
평화누리길 1코스 염하강철책길> 초입에 들어선다. 비장한
걸음을 내딛자마자 걸그룹 뮤직비디오에 등장할 법한
스탬프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 빠알간 스탬프함을
열어보면 센스 넘치는 <평화누리길 패스포트>가 가득 차있다.
아기자기한 사이즈에 깔끔한 디자인. ‘어머’ 소리가 절로 나온다.
평화누리길 종주를 향해 코스마다 스탬프를 찍는 방식이다. 자
여기서 빨간펜 밑줄 쫙, 별표 땡땡. 스탬프는 모든 코스의
초입에만 있다. ‘코스 끝내고 마지막에 도장을 찍어야지’ 라고
다짐 했다가는 낭패를 볼 수 있으니 미리 미리 선불로 찍어두자.
자 이제 본격적인 1코스 종주를 시작한다. 10보 정도 걸으면 철책을 마주하게 되고 해병대 제2사단장님의 훈시가 보인다. 괜히 마른침을 삼켜본다. 제대하며 다시는 철책을 볼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제 발로 찾아오다니. 철책의 긴장감이 주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던 중 철책에 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차가운 철책을 덩굴로 감고 올라 피어진 꽃. 그 이질감이 꽤 묘했다. 그 꽃은 내 발걸음을
한참 동안이나 붙잡고 있었다.
잠시 뒤, 꽃은 내 발걸음을 놓아주며 계속 걸어보라 말했다. 살짝은 얼어 붙었던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꼈다. 걸음을 이어가니 따뜻한 조형물들이 차가운 철책을 녹이고 있었다. 그 해동이 나의
마음도 녹였을까? 철책을 지키는 초소 마저 조금씩 따뜻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철책을 따라 1700보 정도 걸으면 <덕포진> 에 도착한다. 예로부터 이 곳은
강화만을 거쳐 바로 서울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적 요충지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미양요’ 와 ‘병인양요’ 당시 서구 열강으로부터 조선을 지켜낸 격전지다. 그 날
이 곳에 서서 저 바다에 떠있던 서구의 함선을 마주하던 우리 선조들은 어떤 기분이
셨을까.
만약 여기까지의 걸음만으로도 당신이 충만함을 느낀다면 다시 대명항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염하강철책길 순환코스>가 친절하게 표시 되있다. 당신이 평화누리길의 어떤
코스를 걷든 모든 길의 곳곳에 파랗고 주황색의 리본이 당신의 걸음을 이끌어준다.
길가 곳곳에 보이는 돌탑들. 이 탑에 돌을 올리며 사람들은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행복, 건강, 성공, 사랑, 평화 등등. 그 어떠한 이유든 긍정적인 염원들로 가득하겠지.
나도 주위에 있던 작은 돌 하나를 골라 조심스럽게 탑 위에 올려본다.
철책 넘어 갯벌에 갈매기가 앉아 있다. 하늘 위로는 한 마리의 새가 철책을 넘어간다.
새는 이 세상의 어느 철책을 얼마든지 넘나 들어도 아무 의심 받지 않을 유일한 생명체이다.
자유롭게 이 염하강철책을 넘는 새를 보아하니 이 철책이 절대적인 벽이 아님을 느낀다.
이렇게 철책을 따라 논길과 숲길을 10,000보정도 걷다보면 어느새 이 공간의 질감에
익숙해진다.
이 곳이 서부 최전선임을 잊게 하는 평화로운 소리들. 귀를 스치는 바람소리, 부서지는
나뭇잎 소리,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저벅이는 걸음소리. 이 소리들은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게 해준다.
20,000보 정도 걸으면 이젠 굳이 내가 의식하지 않아도 나의 다리가 전방을 향해 움직인다. 초반 페이스에 비해 느려진 걸음이지만 마음만은 개운하다. 내가 어떤 짐을 안고 이 곳에 왔는지 알 수 없으나
그 짐의 무게가 가벼워졌음을 느껴진다.
느려진 걸음으로 마지막 구간을 천천히 걷다보면 어느새 노을이 나의 왼편으로 찾아온다. 오른편으로는 길어진 나의 그림자가 황금빛 논 위에 드리운다. 나의 걸음을 배웅하려 서해의 물이 점점 뭍으로
다가온다. 갯벌을 감춘 바다 위로 반사 된 노을이 나의 눈을 비춘다. 그렇게 염하강의 따뜻한 축복 속에 평화누리길 1코스가 마무리 된다.
노을이 가득한 ‘성동검문소’ 버스 정류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며 생각해본다. 다시 도심으로 들어가 어떻게 걸을지. 그리고 기도해본다. 철책을 녹이던 꽃처럼 오늘 걸은 나의 걸음만큼 철책이
녹여졌길.